
시대의 흔적, 벽의 표정
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내 삶의 언저리에 있는 벽을 담아왔다.
내가 담아낸 벽의 표정들은 어떤 형태로든 동시대의 흔적이자 역사의 편린이다.
사진의 기본 속성인 기록성 차원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.
이런저런 이유로 멋진 풍경사진에 접근할 수 없었다.
대신 ‘도시도 풍경이다’ 또는 ‘사람도 풍경이다’라고 자위하며
도시의 모습과 사람을 함께 담으며 끊임없이 벽을 탐닉했다.
거대한 광고물에 비해 왜소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무력함도 얘기해보고 싶었다.
내 사진에 깊게 작용하고 있는 절제된 틀(Frame)과 조형성은 [벽의 표정]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.
은닉과 누설, 존재와 부재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은 늘 나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다.
또한, 사진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내 사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.
90년대 초 두 차례에 걸쳐 [벽의 표정]을 발표할 때 팸플릿에 남겼던 벽의 의미가 새삼스럽다.
“늘 벽을 느끼며 삽니다. 단절과 장애물의 의미로만 여겨지는 벽,
그러나 저는 벽 저편의 실존을 확인하며 살려 합니다.” – 1992년 [벽의 표정 -Ⅰ]
어느새 인생 종반부에 접어들었다.
되돌아보니 지난날들이 참 어설프고 민망하다.
그러나 아직도 내가 뛰어넘어야 할 벽은 참 높다.
그래, 다시 시작이다. 아름다운 소멸을 위해.
2021년 가을, 雄山堂에서
유 병 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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