초등학교 5학년 봄날, 학급반장 임명장을 들고 자랑스럽게 집에 뛰어갔었다.
어린 나는 어머니 생신 날 혼자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봤다.
아버지 말씀대로 씻겨 드리고, 옷을 갈아 입혀 드리고 유언을 받아 적고….
그 기억은 평생 내 가슴을 저리게 한다.
그날 이후 매일 하굣길마다 작은 포구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동짓재 잔등에 앉아,
멀리 서해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울먹였던 소년,
이제 그 자리에서 포구 전경을 사진에 담으며 눈시울 적신다.
71년 1월, 바닷가 촌놈은 당시 서울에서 제일 높았던 3.1빌딩에서 꿈을 키웠다.
첫 월급을 받던 날, 어릴 적 그렇게 갖고 싶었던 카메라를 샀다.
‘Canon demi EE17’ 하프 사이즈 카메라였다.
빛 바랜 당시의 흑백사진이 정겹다.
나이 사십이 되던 즈음 참 많이 갈등했었다.
다른 사람은 다 영웅처럼 보였고 나만 바보 같았다.
그래서 어줍잖은 수필집 제목도 ‘바보 초상’이었다.
바보 스스로 바보인줄 알았으니 돌이켜보면 참 치기 어린 말장난이다.
오십 넘어, 평생 다니던 은행을 떠나야 할 즈음
나는 ‘실패’라는 어휘의 의미를 되새김질 했었다.
성공하지 못한(?) 내 삶이 실패한 것처럼 느껴졌다.
그나마 그 실패마저 몹시 불완전한 것처럼 여겨졌다.
성공도 실패도 아닌 어정쩡함, 오십 초반의 열정이 감당키 어려웠다.
그 돌파구로, 그 동안 내 사진에 써두었던 짧은 글들을 모아 사진 산문집을 펴내고 전시를 했다.
산문집 제목으로 ‘불완전한 실패’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.
내 삶을 곁에서 지켜보며 늘 다독거려주던 친구녀석이 어느 날 내게 던진 한 마디.
“포기해봐, 뭔가 있을 거야”
그래, 많은걸 포기하고 남는 것에 집중하자.
그래서 산문집 제목은 ‘불완전한 실패’에서 ‘포기해 봐 뭔가 있을 거야’로 바뀌었다.
포기를 다 못한 탓일까? 아직도 내겐 사실 아무것도 없다.
환갑을 맞았던 지난 해,
내 머리 속을 맴돌던 숱한 어휘들. 겸손, 비움, 내려놓음, 사죄….
어느 날, 시든 꽃 한 송이를 바라보다 문득 ‘소멸’을 만났다.
그래, 이제 소멸을 준비해야 한다. 아름다운 소멸을 꿈꾸며 살아야 한다.
더 겸손하게, 더 성실하게, 더 지혜롭게 그리고 열정으로 다시 시작이다.
아름다운 소멸을 위하여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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